《우리나라 조선은 이렇게 해서 커졌다》 연필로 쓴 근대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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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시작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와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부산 영광도서 8층, 김귀동 회장님의 회고록 《고래 심장을 수선하는 남자》 출판기념회장이었습니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곳에 참석했던 한 중견기업의 전무님이셨습니다.
“작가님, 제가 모시는 회장님께서 우리나라 조선사이자 회고록을 집필하시려고 하는데 도움을 주실 수 있나요?”
그 짧은 물음이 긴 여정의 서막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인연의 성분이란 그리 선명하거나 구체적인 것으로 묶여 있지 않음에도 기억의 언저리에 콕 틀어박혀 있다가는 불현듯 강한 파동을 일으키는 구석이 있는가 봅니다. 이것이 어쩌면 인연의 신비가 아닐까 하는데요.
삭막한 공단 속에 숨겨진 비밀의 정원
전무님의 안내로 찾아간 회사는 저의 편견을 보기 좋게 무너뜨렸습니다. 쇠 깎는 소리와 기계음이 요란한 삭막한 공장지대를 예상했으나, 마주한 풍경은 마치 비밀의 화원 같았기 때문입니다. 회사 입구 정면으로 보이는 넓은 대지에는 온갖 꽃과 나무들로 빼곡하게 숲이 펼쳐져 있었고 지저귀는 새들이 방문객을 맞아주었습니다. 일터라기보다는 잘 가꿔진 식물원 혹은 유원지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온화함이 감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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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이 친숙함으로 바뀌어 갈 무렵, 정원 한가운데 이르자 회장님은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주홍 빛 감 하나를 가지째 뚝 꺾어 제게 건네주셨습니다. 11월의 늦가을, 투박하지만 따뜻한 환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정원을 먼저 거닐었습니다. 4월에는 무성한 매실나무 사이를 걸으며, 회장님은 작년에 수확한 매실로 담근 주스와 와인을 꺼내주셨습니다.
“6월이면 매실을 몇 가마니 따서 주스도 만들고 와인도 담근다오.”
회장님은 구내식당 한 켠, 귀한 손님을 모시는 별실로 저를 안내하셨습니다. 직접 담근 와인 맛을 본 사람들은 그 ‘황금비율’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다며 아이처럼 웃으셨습니다.
달콤하면서도 깊은 와인처럼 회장님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찬찬히 정원을 설명해 주셨고, 공장 구석구석을 돌며 현장에서 땀 흘리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저를 소개하고 인사를 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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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생전 처음으로 거대한 선박의 심장인 배전반을 뜯어볼 수 있었고, 바다를 가르는 동력인 프로펠러의 웅장함에 압도되기도 하였습니다. 차가운 쇳덩어리들이 회장님의 손길이 닿자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회장님 곁에서 대한민국 근대 조선의 역사를 기록하는 조력자로 활약하였습니다.
사실과 기억 사이를 잇고
회장님은 1950년대 목선(木船) 시대에 서울대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하고, 고등고시 기술과 1호 자격증을 보유한 대한민국 조선사의 산증인이십니다.1962년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조선업 지원 정책이 수립되던 시기, 회장님은 그 최전선에 계셨습니다. 표준형선 제정을 시도하며 천연곡재 부족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도 하셨지만, 조선학회 활성화와 진흥정책 건의를 통해 조선산업을 국가 핵심 사업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상공부 조선과장으로 재임하며 1967년 조선공업진흥법 제정을 주도했고, 대만 어선 수출, 팬 코리아호 건조, 걸프 유조선 수출, 그리고 마침내 현대의 정주영 회장과 함께한 VLCC(초대형 유조선) 건조에 이르기까지. 회장님은 수많은 고비마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넘나들며 관-산-학-연을 조율한 지휘자였습니다.
“나는 그저 기억을 더듬을 뿐이지. 자네가 이 흩어진 조각들을 잘 꿰어주게.”
본격적인 집필 작업은 고고학자가 되어 유물을 발굴하는 과정과도 같이 세세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회장님은 컴퓨터에 능숙하지 않으셨기에 온전히 기억에 의존해 원고를 써 내려가셨음에도 놀랍도록 날카로우셨습니다. 저는 그 기억을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기 위해 국회도서관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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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쌓인 관보(官報)를 뒤져 당시의 조선사 건설 고시를 찾아내고, 선박관리법 조항과 지방별 조선소 통계 데이터를 찾아 헤맸습니다. 디지털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잠든 사료들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막히는 순간마다 회장님의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빛을 발했습니다.
“5개월이 지나도록 건조계약을 체결하지 못해, 내가 결단을 해야만 했던 거요. 이제부터 계약이 성사되기 전에는 밥을 먹을 수도, 잠도 잘 수 없으니 그리 알고, 이제부터 부르는 조문을 받아 적으라 명했지. 제1조, 범양전용선 주식회사는...”
회장님이 1971년 ‘팬 코리아호’ 계약 당시의 상황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읊으실 때는 흑백 사진과도 같던 과거가 천연색 동영상처럼 되살아나는 듯도 하였습니다. 내가 찾은 것은 차가운 ‘활자’였지만, 회장님이 들려주신 것은 뜨거운 맥박으로, 열정 그 자체로 여겨졌으니까요.
‘나’를 지우고 ‘우리’를 새겨
그런데 작업이 중반을 넘어설 무렵, 회장님의 원고에서 아주 특별한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 혹은 ‘겸손의 미학’이라 생각되는 무엇이었습니다. 보통의 회고록이 “내가 해냈다”는 영웅적 서사에 빠지기 쉬운 반면, 회장님의 육필 원고는 그 정반대였던 것이죠.
아흔의 연세, 노란 나무 자루 끝에 지우개가 달린 연필 한 자루가 회장님의 유일한 집필 도구였습니다. 회장님은 원고를 쓰시면서 당신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를 끊임없이 지우개로 지워내고 계셨습니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우리가 한 거지.”
지우개로 지워낸 자리에는 대신 밤새 도면을 그리던 동료 기술자들, 뙤약볕 아래서 용접 불꽃과 싸우던 이름 없는 기능공들, 묵묵히 지원했던 실무자들의 이름들로 채워졌습니다. 회장님이 고집하신 ‘지우개 달린 연필’은 실수를 고치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불쑥 튀어 오르려는 ‘나’를 지우고, 그 자리에 ‘우리’라는 역사를 새겨 넣으려는 의도된 선택이었음을 그제야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열차 안에서 기억을 더듬고, 사무실에서는 종일 원고에 몰입하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인간극장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제게 미소로 답변하시던 회장님의 말씀이 지금 생각해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회장님,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어도, 어려워도 할 일은 해야지.”
아무 기반도 없던 시절, 나라의 미래를 위해 조선산업의 초석을 다졌던 그 단단한 신념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조선에 바친 헌사
탈고의 순간, 그리고 마침내 책이 세상에 나와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날. 단상에서 축사하며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눌러야 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은 이렇게 해서 커졌다', 이 책의 제목은 과거형이지만, 이 책이 가리키는 방향이 명백한 미래형임을 그 순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폐허 속에서도 배를 띄웠다. 지금 너희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인가, 자본인가, 아니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인가?”
책은 오늘날 위기 앞에 선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장인이 혼을 담아 작품을 빚어내듯 완성된 이 책은, 조선산업 종사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입니다. 비록 몸은 늙어 사라질지라도 그 치열했던 정신만은 이 활자들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기록은 기억을 이깁니다. 그리고 진심은 시간을 이깁니다.”
아흔 살의 거인이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이 투박한 사랑 편지가 부디 많은 이들의 가슴에 닿아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뛰게 하는 심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위대한 기록의 여정에 동행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Writer's Note] 이 글은 《우리나라 조선은 이렇게 해서 커졌다》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대심(代心)의 자세로 임하며 조력했던 지난 시간의 소회를 밝힌 글입니다.
글 | 김명화 자서전 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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